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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金哲) 초대 총무


광주YMCA초대총무는 오랫동안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철이다. 그동안 광주YMCA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절대적인 자료의 부족과 선인들의 오기로 인하여 잘못을 범한 경우가 있는데, 초대 총무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창립 80주년 때 정리한 「광주YMCA약사」에 “초대 회장에는 숭일학교 교사인 최병준이 맡았고, 초대 총무에는 의사인 김철주가 담당하였다”고 하였으나 김철주는 김철을 잘못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광주 3․1운동 재판기록을 보면 김철주는 당시 19세의 숭일학교 학생으로서 징역 10월의 형을 받고 그 뒤 중동중학에 진학하였기 때문에 1920년 7월 29일에 창립된 광주YMCA 총무가 될 수 없었다.


「광주YMCA 50년 약사」와 「70주년 연혁」, 그리고 최윤상의 「광주60년사」에는 초대회장 최흥종, 초대총무 김 철로 되어 있는데, 초대회장은 최병준으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김철 총무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하지만 기록을 찾기 힘들다. 최윤상의 글에는 다음 몇 줄이 적혀 있을 뿐이다. “김철은 3․1운동 전 경찰생활을 하다가 칼을 던지고 나와 항일투쟁에 나선 분으로서 해공 신익희와는 친사돈 간이었다.” 여기에 근거하여 이 고장 출신으로서 김철이란 이름을 가진 독립운동가를 조사해 보니, 하나는 함평 태생의 김철(金澈)인데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의정원 전라도 의원과 교통부 차장, 회계검사원 검사장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해당이 안 된다.


또 한 사람은 나주 출신의 김철(金哲)인데, 최흥종과 함께 광주 3․1운동의 책임을 맡았던 분으로서 최흥종이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미리 체포되자(3년 징역 중 14개월 만에 석방) 김철이 광주만세운동의 주동자가 되어 활동한다. 김강, 최병준, 황상호, 박애순 등 기독교인과 정광호, 최한영 등 삼합양조장(비밀독서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김철도 체포되어 3년 징역형을 받았으나 문화정책으로 인하여 조기에 석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1924년에 최영균 총무가 부임하기까지 초기에 총무를 지낸 김철이 바로 이 고장 3․1운동의 주동자였던 김철이었으리라고 확정할 수 있다. 김철은 뒤에도 최흥종이 1927년 신간회 전남회장을 맡을 때 간사 일을 했고, 1945년 최흥종이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위원장을 맡을 때 역시 간사와 뒤에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도 진보적인 신민당 전남위원장을 맡아 옥고를 겪었으며 4.19혁명 후에는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하는 등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을 하였으나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고 1969년 6월 21일에 별세하였다. 김철은 1890년 10월 9일 나주 출생으로 구한말 나주 지방에서 항일의거를 일으켜 사형 당한 민족주의자 김창곤(金蒼坤)의 아들이다. 묘소는 나주 북초등학교 옆에 있으며 1999년부터 나주사랑시민회에서 독립운동가 하산 김철선생 추모식을 매년 거행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김철의 장자인 김재호는 신익희의 사위로서 상하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을 역임함으로써 3대에 걸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김대중 정권 때에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었고 호는 하산(何山)이고 본명은 김복현(福鉉)이다. 부친은 김창균(金蒼均)으로도 기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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