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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우일선 禹一 善 , 우월순 禹越淳    R. M. Wilson) 선교사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파송된 주된 사명은 교회를 설립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전도를 하는 일이었지만, 그와 함께 학교선교와 의료 선교에 힘썼음은 큰 공적이 아닐 수 없다. 전주의 신흥학교(1900)와 기전여학교(1902), 군산의 영명학교(1902), 목포의 영흥학교(1903)와 정명여학교(1903), 광주의 숭일학교(1908)와 수피아여학교(1908), 순천의 매산학교(1913) 등은 학원선교의 열매이고, 전주예수병원(1897) 광주기독병원(1905) 목포프렌치병원(1898) 순천 알렉산더병원(1913) 등은 병원선교의 결실이었다. 먼저 목포선교부에 배유지목사를 이어 도착한 의료 선교사 오웬은 목포 진료소를 세웠는데, 1904년 광주 선교부가 개설되어 배유지 목사와 함께 광주에 이주한 오웬 목사는 복음 전파에만 전념한다.


그래서 광주 진료소(제중병원을 거쳐 현재 기독병원)는 목포를 거쳐서 온 놀란(J. W. Nolan) 선교사에 의해 1905년부터 개설되었다. 그리고 2대 원장인 윌슨(R. M. Wilson 우월순․우일선) 선교사가 1908년에 부임한 이후 크게 확장 성장하게 된다. 윌슨 선교사는 이 고장의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의료활동을 하는 한편 평생동안 나병(한센병) 퇴치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동역자인 최흥종 장로(뒤에 목사)와 함께 구라사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909년 3월 장흥지방에서 순회 전도하던 오웬 선교사가 폐렴에 걸려 광주진료소로 후송되어 오자 마침 목포 진료소에서 일하던 포사이드(W. H. Forsythe) 의사에게 왕진을 요하는 전보를 쳐서 그는 말을 타고 광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나주 금천 쯤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나병환자를 만나자 그녀를 말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광주진료소에 도착하여 간병하게 된다. 그 동안에 오원 선교사는 이미 별세하였고 나병환자도 죽었지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포의사의 이웃사랑 정신에 감동을 받은 윌슨 선교사는 구라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그때 제중원의 서기로 있으면서 윌슨 원장의 어학선생을 하던 최흥종 장로는 나병 여환자가 떨어뜨린 더러운 지팡이를 주워서 들고 가라는 포의사의 말에 두렵고 놀랐지만, 결국 이를 따름으로써 사랑의 소명감을 깨닫게 되어 평생을 구라사업과 빈민구제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윌슨 선교사는 1909년부터 제중원 뒤편의 가마터에 나병환자를 수용 진료하다가  선교사들의 헌금을 모금하고 영국 에딘버러의 나협회에 연락하여 후원을 받고 최흥종 장로는 자기의 토지 천평을 기증하여 봉선리에 나병진료소를 1912년에 개설하고 거기에 봉선리 교회를 설치하여 죽어가는 나병 환자들을 영육 간에 돌보았다. 그러나 윌슨 선교사는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여 1926년 여천에 애양원을 건립하여 봉선리의 나환자 진료소를 옮기게 되고 자기도 제중병원을 떠났다.


윌슨 선교사의 또 하나의 공적은 제중병원을 양옥 건물로 건립한 것이다. 1911년에 미국인 그라함이 죽은 딸을 기념하기 위해 헌금한 자금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그라함 기념병원(Ella Lavine Graham Hospital)을 건축하여 의료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제중병원은 1926년에 윌슨 선교사가 떠난 뒤 1930년에 부란도(L.C.Brand) 선교사가 원장으로 부임하여, 구라사업 대신에 결핵치료 병원으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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