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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준(崔丙俊) 초대 회장


최병준은 1896년 음력 1월 5일 충남 서산에서 최용규(崔鎔圭)의 독자로 출생하였다. 최용규는 조선조 말엽에 공주부사와 시골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서울에 집을 두어 딸 복동(아명)도 낳았는데 그녀는 뒤에 동경여학교를 졸업하고 문인 홍효민(洪曉民)의 부인이 되었다. 1904년에 부친이 별세하자 최병준은 1907년 12세에에 모친을 따라 전북 군산의 구암리로 이주하는데, 모친은 거기서 선교사의 집일을 보게 된다. 1909년 오긍선목사가 영명중학교를 설립하자 최병준은 그 학교에서 공부하여 1913년에는 4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다. 백영흠 목사의 술회에 의하면 최병준은 백목사의 선배였고, 이수현 목사와 동기였고 영명중학을 마친 후 1년 간 연희전문에 수학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최병준은 20세가 되는 1915년에 광주 숭일학교의 소학과정 교사로 부임하여 청년 교사로서 신망을 받기 시작했다. 24세가 된 1919년 3.1운동 때에는 숭일학교 교사로서 최흥종 목사와 김철, 김강 등과 함께 광주 독립만세운동의 청년 지도자가 되어 크게 활동하는데, 인원동원에 있어 서정희가 일반시민, 김강이 교인을 맡았고, 홍승애가 수피아 여학교, 최병준이 숭일학교를 맡게 된다. 한편 최병준은 수피아 여학생들에게 민족운동에 동참하도록 선동 강연을 하였다. 3월 10일 대대적으로 거행된 광주 만세운동은 일경에 의하여 무참히 탄압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고난을 받았는데, 최병준은 김강, 김철, 정광호, 최한영 등과 함께 3년형을 받았지만 뒤에 감형되어 출옥되었다.


한편 1920년 7월 29일 광주 YMCA는 오원 기념각에서 최흥종 목사를 따르던 30명의 교회청년들과 민족운동가들에 의하여 창립되고, 최병준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1922년까지 봉사하였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선교사 노라복(Robert Knox) 목사의 서기로도 일했던 최병준은 1922년에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에서 장로로 임직되었고, 1923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오랜 시간 뒤인 1935년에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신학교는 매년 3개월씩 공부하고 9개월은 현장에서 목회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수학기간이 길었다.


최목사는 1930년부터 1935년까지 제중병원 조사(현 전도사)로 일했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순천교회 목사로 시무 하였다. 1937년 9월 15일부터 광주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모든 교회가 통합되어 조선교단으로 될 때 광주 교구장에 감리교 신학교 교수인 조직 신학자 정경옥 목사가 초빙되었으므로, 최병준 목사는 1943년 4월 17일 사임하였다. 당시 양림교회 김창국 목사와 금정교회 이경필 목사도 모두 사임한 상황이었다.


최병준 목사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동방요배 등 일제의 강요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아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4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여 순천교회 목사로 시무 하였으나 1945년 5월 5일 해방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30년 말에 Y간사를 하고 해방 후에 Y총무를 역임한 정인세는 최병준 목사의 사위이다. 뒤에 독립유공자로서 1977년 12월 13일자로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고 현재 조선대 최형일 교수는 최병준 회장의 장손이고 아들은 최남식 목사이다.


이와 같이 최병준은 숭일학교 교사로서 이 고장의 3.1만세운동에 크게 참여하였고, 광주Y 초대회장이 되었으며 또한 장로와 목회자로서 복음선교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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