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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압정과 YMCA 수난(1936-1945)


1929년 세계경제공항을 계기로 점차 경제위기가 심화되어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일제는 점차 군국주의적 체제로 사회전체를 개편해 갔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적 대공황으로 국제경제가 대혼란에 빠지자 취약한 일본경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외 팽창 정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일본은 드디어 만주 노구교 사건을 조작해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해 10월 2일을 기해서 미나미 총독이 한국 민족에게 소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것을 발표해 모든 학교와 사회단체와 교회집회에서까지 강요했다. 1938년 2월에는 육군특별지원병제를 발표해 청년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징발하였고, 1938년 8월에는 새로운 조선교육령을 만들어 학교는 물론 사회나 가정에서까지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했으며  신사참배 강요하였다. 1940년 창씨개명령을 내려 우리말 이름까지 빼앗더니 1941년 3월에는 사상범 예비구금령 공포하여 소위 반일, 친미분자 요시찰인등을 검속하였다.


이런 일제의 군국주의에 가장 큰 탄압을 받은 곳은 기독교기관들이었다. 광주YMCA에서도 최흥종 회장이 ‘사망신고서’를 내며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였고, 신사참배 반대와 관련하여 광주의 기독교 학교와 교회, 단체가 핍박을 당하면서 광주YMCA 지도자들도 연류되어 투옥되고 재판받고 형을 받게 되었다. 이에 저항한 여러 광주Y 지도자들은 광주를 떠나 만주지역과 강원도까지 흩어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이 달라 내부적인 갈등도 겪게 되었다. 충장로 회관도 간판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르면서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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