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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세(鄭寅世) 6대, 8대 총무


정인세는 30년대에 광주Y의 간사로서 체육프로를 활성화시켰고 광복 후에는 총무로 선임되어 최흥종 회장과 함께 Y재건에 힘썼다. 그는 1909년 8월27일 서울 마포에서 지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배구, 유도 등 체육 분야에 특기를 발휘하였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18세부터 서울 중앙YMCA에 드나든 것이 체육은 물론 인격훈련과 신앙생활의 터전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독서도 즐겨하고 전국 일주 자전거 여행도 한 정인세는 중앙Y에서 뒤에 총무가 된 현동완의 지도로 훈련을 쌓았는데, 그곳 체육부 친구인 김후옥의 인도로 낯선 광주에 이주하여 간사와 총무를 역임하게 된다.


광주Y는 1932년에 충장로 5가에 처음으로 회관을 건립하였고 거기에 체육관을 개설함으로써 비로소 Y의 영지체 프로그램 중 체육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0년대에 김후옥이 체육부 간사로서 유도와 역도를 지도하고, 정인세는 청년부 간사로서 유도와 덴마크식 기계체조를 지도하였다. 그는 숭일학교에서 덴마크 체조 강습회를 열고 학교 교사들에게 이 체조를 보급시키는데 힘썼으며, 배구 농구 축구 등 체육 만능인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처음에는 잠시 있으려고 광주에 내려왔던 정인세는 Y초대회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최병준 목사의 딸과 결혼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광주Y에서 체육활동 외에도 종교활동과 농촌계몽운동을 열심히 전개하여 광주Y 농업실습학교의 학감 일을 맡아서 어비슨 선교사(협동총무)를 돕기도 하였다.


1937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미션학교인 수피아와 숭일학교가 폐쇄되고 종교계가 탄압을 받고 있을 때 1939년 광주에서 미국 스파이 사건이라는 일제의 조작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정인세는 옥고를 치룬 뒤에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목사는 되지 못하고, 광주 신안교회와 서울 혜화정교회에서 목회자로 시무하였다. 해방 후에 최흥종 목사의 권유로 광주에 다시 온 그는 1945년 9월 재건총회 때부터 1946년 말까지 Y총무를 역임하였고, 1948년 5월부터 10월까지 잠시 총무 일을 다시 보기도 하였다. 양림동회관을 마련하여 청소년의 지덕체 운동을 전개하고 농촌운동을 재개하며 보이스카웃 활동을 시작하였고, 일요강좌와 영어강좌 등 많은 사업을 하였다.


김필례 교장의 뒤를 이어 백영흠 목사가 1947년 6월부터 48년 10월까지 수피아 여중고의 교장을 할 때, 정인세는 교감으로 시무하였다. 그 뒤에 정인세는 최흥종 목사와 현동완 서울Y 총무의 영향과 특히 맨발의 성자로 유명한 이현필 선생의 감화를 받아 헐벗고 소외된 이웃을 위하여 헌신한다. 그는 먼저 고아들을 돌보는 동광원을 설립하였는데 양림동 Y회관 옆에 수많은 고아들을 수용하여 일부Y 지도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동광원은 고아사업을 중단하고 신비주의적인 기독교 수도단체로 바뀌었는데, 이현필의 지도 아래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고 노동, 수도를 하며 재산을 공유하는 등 이질적인 공동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성교회의 비판을 받았는데, 정인세는 Y총무 일을 그만두고 동광원 활동에 전념하고,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귀일원을 방림동에 설립하여 정성껏 봉사하였다. 항상 한복에 고무신만 신고 다니던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다가 1991년 4월29일 생애를 마쳤다. 아들 정건모는 노아복지재단 회장으로서 사회복지운동을 계승하고 있고, 자부인 윤혜자는 정인세 선생의 글들을 엮어 『님께로 가는 길』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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