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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YMCA(1960-1970)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외국의 원조에 의존해 왔던 사회개발이 국내의 재원으로 조달되어야 하는 경제적 자립이 요구되었다. 한국 YMCA도 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해방 후 계속된 북미 YMCA의 재정지원이 마감됨에 따라 자립문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4.19 학생 혁명으로  민주당이 집권하였으나  민주화와 민족 통일에 대한 국민의 욕구에 부응할 만한 정치력을 갖지 못한 채 1961년 5월 군사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빼앗기고 만다. 새롭게 정권을 잡은 군사혁명위원회는 혁명 공약으로 반공체제 강화와 부정부패의 일소, 2년 후 민정이양 등을 약속하였으나 군사정권은 헌법 개정을 통해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사독재를 시작하고  말았다. 군사정권은 제1차 경제개발과 제2차 5개년 개발 계획을 통해 어느 정도의 경제발전은 이루었으나 이농의 가속화와 산업화, 개발의 불균형, 사회적 불평등, 빈부 격차로 인한 사회문제를 양산하였다.


광주 지역은 1960년 중반부터 전남 지역을 휩쓴 심각한 가뭄으로 인하여 피폐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이농민들로 인하여 부족한 주택문제,  실업, 도시빈민층형성 등, 다양한 도시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군사정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의 반체제화와 함께 독재정권의 인권탄압이 시작되었다. 4.19 이후 이에 자극된 한국 YMCA는 기사회생의 노력으로 1962년에 ‘3개년 전진운동’을 시도했으나 프로그램의 전국적 전개라는 측면에서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대도시 YMCA들이 모두 회관 건축에 주된 관심을 가졌었고 또 1961년 이후 군사정권이 모든 민간단체 운동에 극도로 제약을 가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한국 YMCA는 “사회개발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63년 10월 전국대회에서 시청년회의 기준헌장 제정 및 파리기준 보완을 비롯한 대폭적인 연맹헌장 수정을 하면서 새 시대에 부응하는 YMCA로서 변화를 시도하였다.


1960년대 광주YMCA는 경제적 어려운 상황에서 회관 신축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또 1959년에 창립된 와이즈멘 클럽과 성인클럽, 대학 Y, Hi-Y를 중심으로 향토개발사업, 회관 건축 등 외형적과 조직의 확장 및 회원활동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1950년대 수차례 바뀌던 실무자 때문에 일관성이 결여되었던 프로그램도 1959년 김천배 총무의 취임으로 60년대에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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