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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 실현과 YMCA운동(1970-1980)


1970년대 한국사회는 1969년 삼선개헌에 이어 1972년 10월 17일에 유신을 선포한 후 제5공화국까지 군부세력에 의하여 자유와 인권이 유린되고, 개발위주의 경제성장에 치우쳐 고도성장과정에서 누적된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은 문제해결보다는 오히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집단과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고 자신의 정권유지에 사회경제 정책을 이용하였다. 결국 이것은 1970년대 노동자․농민․학생들의 조직적 투쟁으로 이어졌고, 전태일의 분신(70년)과 민청학련 사건(74), 김대중 납치사건(73) YH무역 노동자 투쟁(79), 부마항쟁(79) 등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위한 학생과 시민저항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에 강경 탄압의 대응책을 내세운 군사정권은 민주화 인사를 투옥하고 고문과 군사재판 회부를 자행하였다. 그러다 결국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을 중심으로 한 사회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립은 강압적 정권으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집단의 필요성이 부각되게 하였다.  기독교 이념과 사회운동이라는 정신을 좇아 청소년운동과 사회개발을 중점적으로 전개하고 있던 한국YMCA는 발전적 전환을 하여 기독교 사회운동단체가 정의와 평화에 기반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즉 인구의 도시집중화가  더욱 심해지는 상황에서 (광주시의 인구는 1965년에 36만 5만명에서 52만명('71)으로, 다시 60여 만명('75)으로 연평균 6.6%로 증가하였다. 반면에 전남의 농가인구는 1965년에 6만 6천명에서 5만 7천명('71)으로, 다시 4만 7천명(' 75)으로 감소. 광주시사 참조) 도시빈민층의 증대, 정치적 소외자 및 피해자들의 양산,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욕구와 그에 따른 권력자들의 억압에 대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YMCA의 책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 YMCA는 창설기부터 식민지 치하, 한반도의 분단, 군사독재의 사회적 갈등 등 사회문제 해결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조직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양적성장을 이룬 기독교의 영향으로 YMCA의 전통적 정체성에 제동이 걸리고 보수 기독교와 부딪치게 되었다. 즉 정의구현이라는 기독교사회운동이면서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전통을 가진 기독교의 한 조직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갈등에 봉착하였다. 


 한국 YMCA가 정체성 문제를 겪고 있는 것에 반하여 광주YMCA는 창립 초기부터 이어온 사회정의 구현, 민족사랑,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같은 이론적 기반 아래 진보적인 자세로 기독교 사회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광주YMCA의 정체성은 1971년 제8회 동남아시아 YMCA지도자 대회의 준비과정에서 더욱 적극적인 형태로 변화를 추구하게 된다. (제8회 동남아시아 YMCA지도자대회는 ‘다함께 아시아 개발에’라는 주제로 이루어졌고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광주 YMCA는 시민의식개발, 지역사회봉사, 생활문화 운동에 방향을 집중시키기로 하고 이를 위해 'YMCA 시민논단'‘YMCA사회봉사단’‘신용협동조합’‘산업청년운동’지역사회센터운동‘’연극활동및 싱얼롱-Y'등을 선정한다.)  이를 통하여 철학적 빈곤을 해결하게 되었고  ‘사회정의와 인간의 존엄성 확대’라는 모토 변화를 가져왔다. 즉 YMCA는 자기반성을 통해 중산층의 소비문화에 입각한 수익 위주의 프로그램이 아닌 사회속의 비인간화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개발혜택에서 제외된 서민층의 복리 향상, 전 시민 동참하의 민주주의적 사회 건설로 목적을 확립시켰고 이는 시민의식 개발과, 지역사회 조직화 사업, 민중, 민주화로 이어졌다.


1970년대 광주 YMCA는 종교사업, 시민의식개발사업, 지역사회개발사업, 청소년사업, 국제친선사업, 체육사업, 신용협동조합사업, 생활문화사업, 농촌사업, 캠프사업 등을 중점적으로 실시하였다. ‘기독교 운동체로서의 Y’, ‘행동하는 Y’를 이끌어가기 위한 1970년대 광주YMCA는 운동의 원동력인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회원활동 활성화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 회원확장운동의 확대와 함께 청년 Y가 새롭게 탄생하여 중심적 활동을 하였고 어린이스포츠단과 어린이 캠프는 광주지역 어린이 특별프로그램으로 큰 호응 속에 진행되었다. 요꼬하마YMCA와의 교류로 본격적 국제교류가 시작되었다. 시민의식개발을 위한 시민논단, 신학강좌, 십대의 광장, 지도력개발훈련, 또 본격적인 지역사회개발 및 주민조직사업으로 광천동지역개발 프로그램도 운영되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선교의 현장이 되고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Y가 되고자 각 세대와 계층 속으로 파고드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이것은 지역사회를 위한 YMCA의 역할을 잘 나타내주었고 이후 1980년 광주 민중항쟁에서 보여준 광주시민의 민주화, 인권, 자유에 대한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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