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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흠(白永欽) 9대, 11대, 13대 회장, 초대 재단이사장


해방 후 광주YMCA는 지도력의 교체가 아주 심해서 회장도 자주 바뀌고 총무도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그런 중에도 유지지도력을 대표하는 이는 백영흠 목사였고 전문지도력으로는 김천배 총무를 꼽을 수 있다. 특히 백영흠은 해방 직후 광주Y를 재건할 때 회장 최흥종 목사를 도와 부회장 일을 맡았으며 정인세 총무와 함께 Y재건에 힘썼다. 그리고 1946년 말에는 회장으로 선임되어 Y부흥에 헌신하였고 1950년에도 회장으로 재선되어 일했으며 1962년에도 다시 회장으로 추대되어 1965년 임종철 회장 선임 때까지 수고하였다. 또한 1959년에는 광주Y 재단이사회의 초대 이사장이 되어 1979년 홍승민 이사장 선임 때까지 봉직하였다. 재단이사회는 Y재산의 유지관리와 보존, 증대를 도모하고 Y목적을 위한 수익사업을 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는데, 백영흠 이사장이 이 일을 책임진 것이다. 금남로회관을 건축할 때는 건축위원장 홍승민, 총무 김천배와 함께 많은 수고를 하였다.


은제(隱齊) 백영흠은 1904년 7월 2일 경기도 인천 출생으로서 남장로교 군산선교부에서 설립한 영명중학을 졸업하였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대학 사회학과를 마쳤다. 그리고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1930년부터 일제말까지 전도사(당시는 조사)로 활동하여 화순읍교회와 보성지방 교회에서 순회 봉사하였고,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들이 문을 닫고 광주교구로 통합되었을 때는 정경옥 목사를 교구장으로 모시고 이준묵(뒤에 목사)와 함께 조사로 일했다(후에는 정인보, 성갑식, 조아라, 홍승애 등이  시무하였다). 한편 일제말에 광주에서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체포 탄압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1937년 3월에 정인세, 김현승, 문안식, 문천식, 최기영, 강태민, 백영흠, 김윤식, 전용수, 홍성철 등 13명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1940년 9월에는 선교사들과 가까운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미국 스파이로 죄목을 씌우고 탄압하였는데, 백영흠, 김천배, 조아라, 조용택, 오동옥, 박동환 등이 고초를 겪었다.


백영흠은 해방 후에 목사가 되어 1946년 1월 일본 교회였던 적산가옥을 인수하여 동부교회를 설립하고 1978년까지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 때 동부교회는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였는데 예배의식은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앞선 개혁적인 교회였다. 코리아타임을 배격하여 예배시간을 준수하고 (문을 잠갔다) 헌금함을 입구에 설치하여 연보주머니를 돌리지 않았고 남녀석을 구별치 않고 혼합해서 앉도록 했으며, 찬양대를 2층에 배치하고 찬송가와 성경구절을 벽지로 계시하였다. 백목사는 키가 작고 마른편으로 얼굴에 미소를 띠었으나 고집스러웠으며 결혼식 때 시간에 늦으면 주례를 거부할 정도였다. ‘동광원’의 지도자 이현필과는 동서간이다.


또한 백영흠 목사는 김필례 교장을 이어서 1947년 6월부터 1948년 10월까지 수피아 여중고의 교장을 역임하였다(교감 정인세). 동부교회 시무를 마친 백목사는 1978년부터 2년 간 미국 코넬대학 교회에서 봉사하기도 하였고 귀국 후 상무대 곁의 사저(현 무진교회터)에서 살았는데 1980년 5.18시에는 죽음의 행진에 참가하였으며 , 1986년 별세하여 망월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자녀로는 석윤(재미), 진석과 세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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