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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_icon.jpg 이성학(李聖學) 14대 총무


1906년 10월 14일 해남에서 출생하였고, 해방후 해남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활동을 하였다. 해남읍교회에서 장로 임직을 받았고, 화순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여 복음전파에 힘썼으며,목포 영흥고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광주로 이주하여 양림교회(기장)의 장로로 취임하여 오랫동안 시무하였으며 광주Y를 위해 봉사하였는데, 1953년 11월부터 1954년 8월까지 광주Y의 총무로 일하였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광주Y의 지도력은 수시로 교체되었다. 정인세 총무가 1948년 여름에 동광원 문제로 자리를 떠난 뒤 조철환, 김천배, 김윤식, 정인보, 이성학, 이영생, 김영을 거쳐 1960년에 다시 김천배로 총무가 바뀌었다. 그만큼 당시의 사회는 혼란하고 불안정하였으며 또한 광주Y의 지도력도 정착되지 못하였다.

이성학 장로는 그 뒤 광주Y에서 크게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1978년 광주NCC 인권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반유신 활동과 인권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구속인사나 구속학생들을 위해 법원, 검찰, 경찰서를 오가며 구명운동을 몸소 실천하였고, 특히 젊은이에 대한 이해심이 깊었다. 강직한 성격을 지닌 이성학 장로는 5.18광주민중항쟁에서 핵심지도부로 참여하여 강한 저항을 하였으며, 항쟁 후 지명수배를 받던 중 1980년 10월 22일 별세하였다. 5.18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자녀에는 이흥기, 석기, 준기 등 5남 4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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